작업노트 1 (2013~2016) 우리는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 놓여진다. 넓게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만물(萬物)의 일부로서, 좁게는 인간 사회라는 한정적 범위 내에서 다양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각자가 자라온 환경 속에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층위들은 저마다 나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 행동 양식을 가진 한 개인을 구축하게 된다. 이렇게 독특한 개성을 지닌 개인이 타자와 만나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 가는 과정은 즐거운 경험일 수도 있지만, 때때론 그러한 차이로 부딪쳐 불편한 감정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 맺음의 과정은 우리가 타인의 존재를 통하여 ‘나’를 인식하고,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하는 기회를 제공하며, 나아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어느 것 하나 동떨어짐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인연(因緣)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의 작업은 ‘돌’ 이라는 사물이 만들어 지기까지의 과정을 무수히 많은 인연들이 얽혀 생성된 함축적 사물이자 한 개인을 대변하는 사물로 바라보았다. 하나하나의 돌을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또한 그 돌을 쌓거나 모인 풍경을 화폭에 옮김으로써 본인이 느끼는 관계의 의미를 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돌을 쌓는 우리의 감성이 지닌 내적가치를 포착하고 화폭에 옮김으로써 우리 안의 감정적 교류의 지향점을 본인의 시각과 색채로 그려내고자 하였다.
작업노트 2 (2022) 너를, 보다_우리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며. 대학에 처음 입학하고 나서 어떤 작업을 하고 싶은지 썼던 글을 우연히 얼마 전에 다시 읽을 수 있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단 한 줄의 문장. 스무 살이었다. 삶의 궤적 안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돌아보며 적었던 이 짧은 문장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주제인걸 보면 꽤 깊이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나보다. 미술이라는 시각예술을 업(業)이자 평생의 친구로 삼기로 하고 지금껏 걸어오는 동안, ‘작업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을지’를 계속 고민했던 것 같다. 나의 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살면서 때론 이유가 없는 차별을 경험하곤 한다. 소외를 시키는 사람은 이유가 있다고 항변하지만, 실상 정말 납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세상의 흐름을 되짚어 보았을 때, 대부분의 많은 일들은 나와 ‘다름’에서 시작된다. 다름으로 인해 유발되는 차이는 어느새 차별(差別)이 되어버린다. 요즘도 나와 다르다는 것을 차별을 위한 정당한 사유로 삼고 있는 모순적인 일상을 살고 있는 듯 하다. 생김새가 달라서, 언어가 달라서, 나이가 어려서, 나이가 많아서, 성별이 달라서 등등. 이 사정들이 사람이나 생명을 대하는데 있어 정말 당연한 걸까. 익숙해지지 않는 날선 시선과 아무렇지 않게 내뱉어 지는 차별의 언어들이 이 순간 글을 작성하는 나에게 조차도 시간이 갈수록 당연하게 내재화 되어가는 느낌이란 것이 사뭇 씁쓸할 뿐이다. sns와 미디어의 발달이 사람들 간의 물리적인 거리를 좁혀주었고 정보의 소통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도 주었지만, 가끔씩 심리적인 관계에선 여전히 외로움이 느껴지곤 한다. 어쩌면 그러한 불편한 감정들은 사실 우리가 파편적으로 보이는 시야의 조각이 전부라 생각하고 알려고 하지 않음에서 오는 어려움은 아닐지 생각하게 된다. 얼마 전, 최재천 교수님이 집필하신 ‘최재천의 공부’라는 책에 이런 말이 있었다. ‘알아가려는 노력이 축적 될수록, 이해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 문장을 보는 순간 나 역시도 다시 물어 볼 수밖에 없었다. 진정으로 서로를 알아가려 노력하고 있는지를. 작업을 시작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게 주어진 역할은 많이 바뀌었다. 학부생에서 대학원생으로, 대학원생에서 한 사람의 아내이자 엄마로. 아무래도 지금 ‘엄마’라는 역할에서 주 관심사는 당연히 ‘아이’일 수밖에 없다. 육아를 하며 보는 세상 속 소식들, 때론 아이를 향한 차가운 시선들은 그런 불편한 감정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 더 남을 너그러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향한다면 모두가 조금씩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의 오랜 작업의 주된 주제는 '관계였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어디선가 그가 가진 하나의 우주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했었다. 우리가 사는 무한한 우주도 끊임없이 알기 위한 노력을 거치는데, 한 사람의 온전한 우주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그렇지 않을 듯 싶다. 아이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아이들이 보여주는 담대한 마음은 때론 어른인 내가 부끄러워질 때도 있었다. 그들의 관계는 거침이 없고, 순수하다. 서로의 안에 들어가는 것에 그다지 망설임도 없었다. 물론 어른들의 그것과는 달리 서툴고 투박하지만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하고 사랑한다. 좋을 수도 불편할 수도,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무수한 시간의 결이 겹겹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다름’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듯 하고, 적어도 아이들은 그렇게 보였다. 우리도 모두 아이의 시절이 있었고, 그 마음도 있었다. 커 오면서 현실 속에 그 마음은 잠시 가려진 것일 뿐 누구나 그 마음을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 가지고 있으리라. 오래도록 생각해 왔고 풀어낸 그림 안에 현재 관심사인 아이들이 함께 하면서, 이번 작업은 그렇게 마음 한 구석 먼지가 켜켜히 묵혀진 사진을 조심히 꺼내어보며 상기시키는 과정이었다. 그 시선을 그림 속에서 느낄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알고 이해하기 위해선 보아야하고 관찰해야 한다. 편견없이 비워내는 마음도 있어야 하는 듯 싶다. 나의 그림도 아이의 성장과 더불어 시간이 흐르다 보면 형태는 조금씩 바뀌어져 가겠지만, 처음의 그 한 문장처럼 지극히 사적이며 또한 보편적인 이야기들을 올곧이 현실에 발을 딛고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한다.